KOZA의 개요 및 역사

KOZA의 역사

1871년(메이지 4년),메이지 정부가 실시한 "폐번치현"제도에 따라 류큐번이 오키나와 현으로 개명되었다. 1908년(메이지 41년),“오키나와현 및 쵸, 마을제”제도에 따라 오키나와현의 전신인 고이쿠 마기리와 미사토 마기리가 각각 고이쿠 마을과 미사토마을로 개명되었다. 1945년 3월의 참혹한 오키나와 전쟁에서 당시 총인구의 3분의1에 상당한 5300명이 전사했다. 오키나와 전쟁이 끝난 1945년(소화 20년)9월,난민 수용소가 설치되었던 시치오송을 중심으로 인구가 급증하는 지역에서 "시 제도"를 실시했다. 고이쿠는 코자시로 되었고 미사토•구시카와 일대는 마이하라시로 되었다. 다음해에“시 제도”가 해제되었기 때문에 다시,고이쿠, 미사토로 회복되었다. 1956년(소화 31년)6월 고이쿠는 코자로 개명하고, 같은 해 7월 시로 승격되었다. 이렇게 되어 코자시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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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백색의 아치형 지붕은 중앙공원의 오늘을 상징하고 있다. 1982년 이전에는 야자수를 표지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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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KOZA에서 유명한 뉴욕식당, 외국인과 현지 주민뿐만 아니라 관광객들도 즐겨 찾는 맛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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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고야 사거리에 신호기가 없을 경우, 경찰이 교통을 통제한다.

오키나와시의 역사의 거리의 음악은 미군기지의 경제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함께 산생하고 발전했다.

전쟁 후 ,인접한 카디나 지역에 미군기지가 세워졌고, 미군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과 오락 서비스가 우후죽순처럼 나타났으며 KOZA시의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미국은 당시 재즈 음악이 성행했다. 미국인으로 넘치는 코자에서 재즈음악에 대한 수요도 빠른 속도로 팽배했고“음악의 도시”발전의 길에 들어섰다. 1960년부터 락 음악이 성행하고, 미국인에게 공연을 하는 과정에서 오키나와 본토 음악가들의 실력도 크게 향상되었다.「Condition Green」,「자(紫)」,「Kyanabisu」,「메듀사(Medyusa)」등 유명 밴드가 선후로 속출했다. 같은 시기「파초포」,「노아란 무궁화」,「고향의 비」등 명곡을 남긴 후쿠하라 트수니오 작가도 KOZA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활약했다. 작가의 영향력은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고, 창작한 곡 역시 오늘까지 그 열기가 시지 않고「후쿠하라의 선률」로서 후세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전쟁이 끝난 후의 오키나와는 살아남기 위해 미국의 문화를 지속적으로 받아들였으나, 오키나와 자체의 문화도 잘 보존했다. 짬부르 문화는 다양한 문화의 충돌과 융합속에서 탄생한 듯 싶다.

「섬 EISA대회」를 가지는 목적은 "기지경제에 대한 극대화된 의존을 탈출"하는 것이다.

“EISA의 도시”라는 이 이름은 미군기지와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1956년,“미국의 1차적 군사용 토지 구매「권고」”에 반항하여 「섬 전체의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 후 미국정부는 「섬 전체의 정쟁」이 일어난 것을 제재하기 위해「Off•Limits정책(미국 군인•군인가족•가정 개인 지역 출입 금지규정)」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이로하여 기지경제에 의존하던 코자시의 여러 공상업자들이 큰 타격을 받았다. 이해는 또한“오키나와 섬 EISA축제”의 전신인「오키나와 섬 EISA대회」가 열린 첫해이기도 하다. EISA역시 전쟁후 경제복구의 상징으로 젊은 세대들이 많이 집거한 KOZA시에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EISA로 우리의 정신을 되찾자」는 운동이 열기가 오르면서 에이사 대회도 뒤미처 열리게 되었다. 대회의 개막행사 즈음부터 시작하여 코자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EISA”를 추면서 즐기고 있다.

[미국통치에 대한 불만」과「반전쟁 가곡」중에서 일본 귀한을 맞이했다.

1970년(소화 45년),이토만 여성이 깔려죽은 사건이 일어난 같은 해 12월 20일 미국의 장기적인 억압통치에 반항하여 불을 지르고, 부수고 마슨 미국군「KOZA폭동」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인권 및 귀환운동에 큰 영향을 가져다 주었다. 베트남 전쟁이 대치상태에 있을 때 반전쟁가곡을 중심으로 하는 민속가곡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KOZA시 출생인 사와토리가 「오키나와 민속촌」을 설립했고, 본인 역시 전국적인 범위에서 민속가수로 활약했다. 1972년(소화 47년),미국이 오키나와현에 대한 27년간의 통치가 결속되었고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반환되었다. 1974년(소화 49년)4월,KOZA시와 미사토마을이「오키나와시」로 합병되었다. 반환 후 ""기지경제에 대한 극대화 의존을 탈출""하려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국제문화관광도시」로 발전할 것을 공표하고“사회자본확충”과“상가의 근대화”등 조치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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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사진 오른쪽의 흰색건물은 BANK OF THE RYUKYU로 오늘날의 류큐은행이다. 고야 사거리의 길모퉁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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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Parumira의 거리는 붉은 벽돌을 깔아서 만들었다. 90년대전 이곳은 아스팔트가 깔린 거리로 일본상가가 집결된 곳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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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오키나와 교통요로로 흥기된 고야 사거리는 KOZA사거리 부근에 있다. 이곳은 코자시가 미사토 마을과 합병하기 전의 사진이다. 당시 공공버스는(외관은 용묘 자동차와 비슷함)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교통도구였다.

20세기 90년에 나타난 전대미문의 "오키나와 열기”

20세기 90년대에 들어선 후,오키나와 출신 테루야 린켄(teruya rinken)이리더로 있는 「RINKEN밴드」가 오키나와 민요의 인지도를 일본 전체에 확산시켰다;민요가수 치나 마사오가 제작자로 있는 걸그룹「Nenes」이 처음으로 데뷰하고 오키나와시를 중심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2003년,구성원 전체가 오키나와 출신으로 된 밴드「ORANGE RANGE」가 정식으로 데뷰하는 등등, 지금까지도 많은 예술가들이 속출하고 있다.

도시 진흥을 위한 "음악의 도시 구상"

현재 오키나와시에는 많은 Live House와 민요카페가 있고 시에서는 「Peaceful Love•Rock Festival」등 여러 가지 음악행사가 열리고 있으며 음악을 발전 번영시키는 성지이다. 2006년,오키나와가 보유하고 있는 튼튼한 음악문화를 바탕으로 도시의「음악의 도시 구상」을 발전시키기 위한 행동을 개시했다. 두번째 해, 구상을 실현하는 핵심시설인「KOZA음악의 도시•음악시장」이 영업을 개시했다. 이곳은 관광시설일뿐더러,향후 음악계를 지켜나갈 인재를 육성하는 것을 책임졌고,도시건설의 새 지표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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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아치형 둥근 지붕을 한 상점거리「은천가」의 전신은 사거리 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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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60년대 고야의 공공버스역 앞. 전기제품 가게의 네온사인은 거리에 생기를 가져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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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미국인의 차가 줄줄이 서있다. 쇼핑센터 역시 당시 미국의 상징이었다.